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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중생 A / 재희미래 ] 무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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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중생 A / 재희미래 ] 무제

@YatMatK 2016. 10. 7. 18:12











   난 언제나 검은 색 물감을 뒤집어 썼다. 딱히 이유가 있어서도, 내가 원해서도 아니다. 그냥 마땅히 내가 그래야만 한다는 느낌에 사로잡혀, 그 오물에 찌든 검은색 물감을 뒤집어 썼다. 코를 아프게 만드는 강렬한 냄새에 억지로 숨을 참으면, 또 가슴이 답답해와 그저 한숨이 될 노력에서 그쳤다. 그러기를 몇 년, 아니 몇 달, 아니 며칠. 정확히 가늠할 수 없는 그 길 위를 걸어오는 동안 나는 누구에게나 검은색으로 인식되어 갔다. 쟤랑 섞이면 너도 탁해져 버릴 거야. 조용히 말해도 내 귀에 정확히 꽂히는 그 말은 그나마 다른 색과 희색되어 밝아질 내 미래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듯이 다가왔다. 장미를 가지려면 줄기의 가시에 목을 졸려야만 한다는 것처럼 말이다. 억울하고 울분이 터지지도 않았다. 나는 언제나 그래왔고, 수차례 내 위에 쏟아진 그 물감들은 씻을 수 없이 굳어버렸으니까.

   그런 나를 잠시 감싸주었던 것은 게임이었다. 모니터 안의 세계지만, 모니터 속의 다른 모니터 너머의 사람이 나를 믿어주고 신뢰한다는 게 좋았다. 모두에게서 호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었다. 그렇게 아직 아무 색으로도 물들지 않은 여리디 여린 손가락을 알록달록한 색으로 물들이면, 나는 마치 필요해져 버린 사람이 된 것과도 같은 기분을 받았다. 그렇게 오물 썩은 냄새를 맡으며 전전긍긍하던 그 과거에서 갑자기 누군가가 나를 잡아끄는 기분. 굉장히 묘했다. 글을 쓰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단어를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리고 이유 중에 하나라면, 나는 여러가지의 단어들을 뜻만 알지 겪어보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특히 따스함, 온기, 친절함, 배려 같은 단어. 누구에게는 지독하게도 익숙해서 있는지도 모르게 느껴지는 단어일지 몰라도, 나는 다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검은색 덩어리가 되버리면, 나는 눈을 감는다. 며칠 전부터 내 상상 속에 한 아이가 있었기에. 노란 금발의, 잘 모르겠지만 나름 잘생긴 것 같은 남자애였다. 그 아이는 밝았다. 가끔씩 어리석게 그 아이 주변에서 빛이 그 아이를 감싸는 것 같은 생각을 했다. 나랑은 다른, 밝은 느낌의 여러가지 물감을 몸에 칠한 그 아이. 부럽다, 나는 이렇게나 지독하게 살아가는데. 손 내밀 생각은 하지 못한다. 내가 저 아이를 검게 물들일 것이 뻔하니까.


   "…."


   컴퓨터를 바라보았다. 사치, 일 것이다. 내가 저 안의 세상처럼 하루를 맞이하거나, 저 안의 세상 사람들 같은 사람이 내 주위에 생긴다는 것은. 아, 바라는 것조차 사치이다. 오물을 뒤집어쓴 냄새나는 인간에게 그런 것을 생각하는 건, 내가 나 스스로에게도 상처를 주는 것과 같다. 되지도 않을 일, 이루지도 못할 일을 떠올리며 행복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꽤 어릴 때부터 깨달았으니까. 나의 세상이 그렇게 가르쳤으니까.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다고 손가락 받을 자격이 있는가? 라는 질문을 누가 던진다면 대답하지 못하겠지. 나의 세상의 잔인함은 이미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까맣게 물들여 버렸으니. 현실에 안주한다? 과거에 연연한다? 미래에 집착한다? 이미 온전한 오물 덩어리인 나에게 그런 게 있을리가 없잖아.


   "있어. 충분히 네게도, 있을 수 있어."

   "…?"



   놀라 고개를 들었을 때엔, 상상 속에서 존재했던 아이가 있었다. 밝다.


   "놀란 거야? 의외네―! 항상 눈을 감고 나를 불러서, 나는 이렇게 내가 널 불쑥 찾아와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

   "대답을 해줘. 아차, 내 이름은 재희야! 네 이름이 미래인 건 이미 너무 익숙해."


   밝은 아이, 그러니까 재희는 나를 왜 찾아온 것일까. 착한 아이가 되고 싶은 동정이라면, 나는 받아줄 수 없다. 그저 순수한 동정이라고 해도 받아줄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난 내 상상 속의 아이가 검게 서서히 물드는 것은 볼 수가 없다. 언제나 밝고, 웃고 있었으며, 그 존재만으로도 나에게 그나마 '무언가를 했을 때 미묘하게 느껴지는 설레임'을 현실에서 느꼈으니까.


   "나에게 친절을 베푸는 이유가 뭐야?"

   "굳이 그런 게 있어야 친절을 베풀 수 있는 거라면, 이 세상은 너무 척박한데―"


   아, 저 아이는 빛이니까, 그러니까 저렇게 말할 수 있는 거겠지.


   "…앞으로는 내 상상 속에서도 널 지워야겠다."

   "그럼 난 네가 전혀 모르는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네게 찾아올 건데?"

   "…."

   "까맣게 변해버린 네가 더러운 게 아니야."


   아이는 그렇게 소메로 촉감이 이상한 물감들을 걷어내고 날 향해 웃었다.









공백 포함 2,267 자 / 공백 미포함 1,626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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